“느려도 좋아”…‘장애 품은’ 농업, 농촌까지 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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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150회 작성일 24-03-11 03:03본문
장애 자녀를 둔 부모의 소원은 흔히 ‘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라고 한다. 그만큼 자기가 죽은 이후 남게 될 자녀의 삶에 불안감이 크다.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조명숙씨도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한결 가볍다. 드디어 안전하고, 아이도 즐거워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서다. 경기도 여주시 오학동에 있는 푸르메소셜팜이다. 이곳에 안착하기까지 아들의 일자리를 찾는 일은 정말 순탄치 않았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은 1년 만에 코로나19로 문을 닫거나, 위험한 작업환경 탓에 오래 일하지 못했어요. 아무리 지적장애라고 해도 신체는 멀쩡하니 힘쓰는 일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회사 40곳 정도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연락 한 통 받지 못했죠. 할 수 있는 일과 상관없이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제외되는데 너무 속상했어요. 이곳에선 누구나 잘한다고 칭찬해주지, 긴장할 만한 상황이 없어서 좋아요. 학교 다닐 때 놀림 안 당하고, 안 맞아본 아이들이 없어서 친구는 두려운 대상,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요. 그런데 이곳에선 정말 끈끈한 관계는 아니어도 한 공간에 있으면서 막 웃고 떠들고, 즐겁게 일해요. 세상에서 제일 원하는 게 친구인데, 여기선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죠.
푸르메소셜팜은 발달장애인에게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 주자는 취지에서 푸르메재단과 기업체, 지자체, 공기업, 기부 시민이 힘을 합쳐 만든 사회적농장이다. 스마트팜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하는데, 장애직원들은 자기가 기른 토마토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성취감을 느낀다. 도움만 받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주체라는 걸 깨달으면서 자존감을 키울 수 있다.
농업에서 장애인 일자리를 찾다
푸르메소셜팜은 올해로 정식 개원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이상훈·장춘순 부부가 기부한 부지에 유리온실과 가공시설, 베이커리 카페와 문화교육센터가 들어섰다. 이곳에서 일하는 장애직원은 수확팀, 가공팀, 카페·베이커리부 등 총 54명이다. 2020년 15명에서 시작해 지금은 목표치였던 60명을 거의 채웠다. 장애인을 위한 좋은 일자리라는 소문이 나면서 울산과 대구 등 먼 지역에서도 찾아왔다. 조명숙씨도 구미에서 올라와 이곳에 정착해 근로지원인으로 아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지난 3월 4일 푸르메소셜팜의 온실에서는 토마토 줄기가 1m 이상 솟아 있었다. 길게 줄지어 있는 배양토 사이로 양쪽에 파이프가 깔려 있었다. 작업용 리프트가 이 파이프를 타고 이동하는데 겨울에는 온수가 돌아 난방 기능도 겸한다. 스마트팜은 보통 자동화로 인건비를 줄이는데 이곳에선 그렇게 줄일 수 있는 비용으로 장애인을 고용하고, 안전한 일자리를 만든다. 임규형 푸르메소셜팜 재배팀장은 초반엔 직원들이 겹순이 아니라 꽃이 올라가는 줄기를 따는 경우가 많아 계속 지도를 했고, 리프트도 위에 올라가면 흔들거려 어려워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잘 적응했다고 설명했다.
장애인 직원 채용 과정에서는 겹순을 배운 대로 잘 떼내는지, 리트프 위에서의 작업이나 수분을 위해 키우는 벌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지 눈여겨본다. 임 팀장은 팀별로 테스트가 있다. 가공팀은 무게를 잴 수 있는지를 기본으로 보고,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은 어질러진 물건을 치우고, 빨래를 할 수 있는지를 본다고 말했다. 여기서 합격점을 받으면 3주간 장애인고용공단의 훈련 프로그램을 거친 후 채용한다. 합격률은 절반 정도다. 장애직원들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하루 4시간 근무한다. 한 달에 100만원 조금 넘게 받는다. 많지는 않지만 최저임금 이상이며,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라는 장점이 크다.
온실 옆 가공실에선 방울토마토를 세척하고, 무게를 달아 포장하는 일이 한창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장애직원 김종익씨(25)는 일이 재미있고, 신난다고 했다. 김씨가 처음 일한 곳은 카페였는데, 여기가 더 일하기 좋고 편하다고 했다. 일이 끝나면 엄마에게 라면을 끓여주려고 요리 수업을 듣고, 동료들과 탁구를 한다. 지화정 푸르메재단 과장은 이젠 장애직원이 웬만한 비장애인 직원과 비교해도 숙련도가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일하면서 수다 떠는 재미도 알아서, 일이 끝나면 같이 프로그램도 듣고, 노는데 그런 것에 만족도도 높다고 설명했다.
푸르메소셜팜은 SK하이닉스와 여주시, 지역난방공사가 함께하는 컨소시엄형 장애인표준사업장이다. 최저임금 적용 제외를 받을 수 있는 장애인 직업재활시설과 달리 이곳에선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 표준사업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은 장애인고용의무를 지분에 따라 이행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SK하이닉스는 장애인 의무고용 기준을 이미 넘어섰지만 푸르메소셜팜 건립을 위한 건축비 50억원을 기부하고, 생산품도 거의 전량 직원 판매용으로 구매하면서 지원하고 있다. 덕분에 농장 운영이 빠르게 안정될 수 있었다. 임 팀장은 생산량을 농가 평균 수준까지 올리는 게 올해 목표다. 지난해에도 생산량은 괜찮았지만, 가격이 낮았을 때 출하된 경우가 많아서 올해는 가격이 높은 여름철 수확량을 늘려보려 한다고 말했다.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는 발달장애로 묶여 있지만 장애인별로 특징이 다르다. 지적장애여도 말은 잘하는데, 막상 몸으로 따라 하지 못하는 인스타 좋아요 늘리기 경우가 있다. 자폐성장애는 사회성이 낮고, 혼잣말을 자주 하거나 주변 환경이 바뀌면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는 경향이 있다. 음악을 틀어놔야 일을 하거나, 일하기 전 농장 주변을 산책하는 등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 비장애인은 이런 이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어서 둘 사이에서 가교 구실을 하는 근로지원인 제도가 있다. 이곳에도 장애인고용공단에서 지원하는 근로지원인 4명이 함께 일한다.
이수연씨는 아홉 살 때였던 2002년부터 장애인 재활시설에서 살다 2년 전 푸르메소셜팜에 취업한 후 자립에 도전했다. 먼저 시설에서 나와 친구와 함께 자립생활 체험홈에 들어갔다. 이씨는 처음엔 내가 자립할 수 있을까, 내가 자립해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조금씩 떨어져 살면서 자립하고 싶다는 걸 느꼈고,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립홈 생활은 이제 2년을 넘었다. 자립 훈련 과정을 3년간 거치면 지자체의 자립생활정착금을 지원받아 독립할 수 있다. 곧 진짜 홀로 설 수 있는 순간을 맞는 것이다. 이씨는 농장 일을 오래 하고 싶고, 일과 후엔 동물보호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자립하는 걸 보고 자극을 받아 ‘돈을 벌어서 땅을 사겠다’, ‘집을 사겠다’,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었다. 김종익씨도 올해 1월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이렇게 독립된 삶을 택할 가능성이 열린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는 장애인과 가족의 최종 목표는 독립생활이다. 내 월급으로 살고, 혼자 독립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장애인이 독립한다는 건 장애인을 돌보던 부모와 조부모 등 3대가 독립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자체가 지역의 좋은 기업과 협업해 하나씩만 만들어도 정말 모범적인 일자리, 장애인의 삶을 바꾸는 일자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업후계자 도전해 창업 준비하기도
현재 장애인 일자리의 대부분은 제조업에서 나온다. 서비스업으로 카페·베이커리에서도 일하지만 다양한 장애직원을 품기엔 한계가 있다. 반면 농장은 모든 작업을 장애인이 할 수 있다. 제품 불량이 치명적인 제조업과 달리 실수와 느림도 품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농작업을 세분화하면 장애인에게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다.
임업도 도전해볼 만하다. 전남 순천시 모이라 사회적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모이라 농장은 발달장애인 5명에게 임업후계자 교육을 하고 있다. 지난 2월 29일 모이라 농장에서 만난 양재순 이사장은 숲에서 심신을 치유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 농업으로 자활·자립을 넘어 창업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3년째 교육을 진행 중인데 첫해엔 기술적 부분보다 숲을 산책하고, 나무와 풀을 관찰하는 등 숲에 친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수국을 꺾꽂이해 보는 간단한 작업을 하면서 재미를 키웠다. 모이라 농장은 부모·가족의 치유도 강조한다. 그래서 두 번째 해엔 가족이 함께하는 돌봄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양 이사장은 한명의 장애인을 돌보기 위해 가족 누군가는 희생하는 상황이라 가족 전체의 돌봄이 중요하다. 아이가 재활하고, 창업해 부모에게서 떨어지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부모도 쉴 수 있다. 아이가 혼자서 뭔가 하는 걸 보면 그 자체가 부모에겐 안정감과 행복감을 준다고 말했다.
위험하다고 여기는 가위와 칼, 톱까지 써보도록 했고, 지난해에는 완전히 수익구조를 내는 쪽으로 훈련을 시켰다. 상토판에 흙을 채우고, 모종을 심고 키우고, 분갈이하는 등 전체 생애주기를 혼자 마칠 수 있게 했다. 양재순 이사장은 한 작물의 생애주기를 온전하게 습득해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배운 대로 작물을 키우고, 소득을 창출해 소비자를 만나는 것까지가 우리의 교육 프로그램이다라고 설명했다. 올해부터는 3년간 함께한 발달장애인이 보조 강사로 나서서 다른 장애인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참여한다.
모이라 농장에서 교육을 받는 발달장애인 중 맏이 격인 박재현씨는 올해 산림청이 주관하는 임업후계자 사업에 도전했다. 임업후계자가 되면 1%의 저금리로 땅을 살 수 있는 3억원의 자금을 35년간 빌릴 수 있다. 지난 2월 말 면접을 봤고 결과는 3월 말쯤 발표된다. 박씨가 합격하면 장애인이 임업후계자 창업으로 자립하는 첫 사례가 된다.
박씨의 아버지 박종신씨는 모이라 농장 인근의 임야를 알아보고 있다. 박종신씨는 아이가 처음엔 나서지 않고 움츠리려고만 했는데, 교육을 받으면서 어느 시점에선 먼저 반장을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하고, 사회성도 커졌다면서 비장애 청년도 되기 어렵다고 들었지만 올해 결과가 좋지 않아도 내년에도 도전하겠다고 한다. 우리 애가 나이가 있어서 먼저 나서지만 일정 시점이 되면 다른 장애인도 함께 도전할 계획이다. 그때 함께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기 위해 땅을 준비하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농업에 치유·돌봄 결합해 농촌 살린다
농업은 장애인만이 아니라 노인, 암환자, 우울증이 있는 사람 등 치유가 필요한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된다. 조현정 한걸음마음상담센터 센터장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보고, 수확하면서 매우 큰 보람을 느끼게 된다. 품앗이로 농사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기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그런 데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농업은 교육과 재활, 일자리 훈련, 심지어 사회통합에 이르는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농업의 다차원적 기능에 주목한 것이 1990년대 후반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케어팜이다. 새 소득을 창출하고 싶어한 농업인과 시설의 대안을 찾고자 한 사회복지·시민사회 영역, 농업의 다원화를 장려하려는 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후 유럽에서는 보건복지 분야 돌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됐다. 일본에서도 농업(1차)과 농산물을 활용한 생산품 제조(2차), 농업 자원을 활용한 서비스업(3차)을 결합한 6차산업을 내세우는데, 농업과 복지 서비스의 연계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재활과 자립에 주목할 경우 사회적농업으로 부르기도 하고, 치유농업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치유농업법이 2021년 3월 시행되면서 제도화됐다. 치유농업사라는 자격증도 생겼지만 아직 활성화됐다고 보긴 어렵다. 치유농장을 운영하는 이들은 운영비를 확보하는 데도 힘에 부친다. 농촌경제사회서비스법이 올해 8월부터 시행되는데 정부와 지자체가 농촌의 생활 서비스 부족 문제를 해결할 주체로 ‘농촌 서비스 지역공동체’, ‘사회적농장’ 등을 지정·지원할 수 있게 되면서 숨통이 트일지 주목된다. 이경찬 지역아카데미 교육농장센터장은 농촌경제사회서비스법은 지방소멸에 대응하기 위해 농촌공동체 기반의 경제사회 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정부·지자체 칸막이 없는 협력 필요
부처 간 협업도 중요하다. 치유·돌봄 농업과 관련된 일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농림수산식품부, 농촌진흥청 등 여러 기관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관할하는 장애인고용기금을 사회적농장 경영주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재정을 사회적농장 바우처 재원으로 투입하는 등 부처 간 협업이 필요하다. 박상식 다기능농업연구소 대표는 특히 치유농업이나 사회적농장의 성공을 위해 중간지원조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전통 농업에 종사하던 분은 치유나 돌봄 영역의 전문성이 부족할 수 있으니 은퇴 후 귀촌·귀산한 사회복지사 등을 활용한 중간 지원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농업 자원을 제공하는 건 농업인이, 치유돌봄 프로그램은 중간 지원 조직이 맡는 식이다.
푸르메소셜팜의 후속 사례는 아직 없다. 다만 충남 당진시에서 조례를 제정해 준비하고 있고, 강원 춘천시도 관심을 보인다. 푸르메재단도 경기 용인과 김포, 고양 등 수도권에서 새로운 농장을 만들려 하는데 땅 구하기가 쉽지 않다. 진입로도 있고, 대중교통 기반도 어느 정도 있어 장애인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은 땅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지자체가 땅을 갖고 있어도 개발 용도로 쓰려 하지 농장으로 쓸 생각은 별로 없다. 백경학 대표는 장애 청년을 고용해 이들이 평생 안정적으로 일하고, 독립적 삶을 만들 수 있다고 보지만 반대하는 분들은 그 돈이면 외국인 노동자를 쓰겠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의 표는 응집돼 정치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확신을 하고 추진하는 단체장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푸르메소셜팜의 미래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 마을이다. 노년의 장애인이 의료·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능도 갖춰야 한다. 백경학 대표는 장애인이나 환자가 집이나 병원에 머무는 것보다 농장에서 밭을 갈고, 먹이를 주는 게 육체적 건강을 지탱하는 데 훨씬 비용이 적게 들고, 행복감도 크다. 네덜란드 정부는 암환자나 치매환자, 비행청소년 등 치유가 필요한 이들이 농장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마다 건강보험에서 비용을 지불한다. 우리도 노령화가 진행될수록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다. 결국 농장은 단순히 생산·판매만 하는 곳이 아니라 치유농장의 역할도 같이하게 된다. 푸르메소셜팜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하고, 정부도 이런 방향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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